나는 그렇게 최재현과 함께 하는 일상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일 없이 평탄한 하루가 매일같이 이어졌다. 당장 눈앞에 닥친 불안이 없으니 내 인생에 여유라는 것도 생기는 모양이다.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기억은 종종 먼 옛날까지 흘러들어가 있었다. 나무 냄새와 먼지냄새가 뒤섞인 다락방의 창고를 벗어나 처음으로 디딘 바깥 세상은 생각했던 것 ...
최재현은 영화관에 못 간다.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도 못 간다. 그러니 좋은 데이트 상대는 아니었다. 장마가 지났지만 여전히 여름인데 최재현 혼자 청량하다. 장마철이 지나니 이제 살 것 같은 모양이다. 나는 덥고 숨 쉬는 것도 짜증나는데 본인은 꽤 신이 났다. 햇빛도 못 보고 산 것 마냥 흰 피부가 반짝거린다. 나는 그런 최재현을 멀리서 가만히 보고 있다...
햇살이 들어오는 원룸을 가만히 서서 쳐다봤다. 없으면 없는대로,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짐을 늘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산 게 무색하게도 이 곳은 생각보다 많은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10년의 흔적이 차곡 차곡 쌓여 손 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항상 쓸쓸할 정도로 비어있다고만 생각했는데. 물건들로 집 안이 복잡하게 어질러진 모습을 보니 스트레스가 치밀어 오...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나를 제 집 현관에 밀어 넣은 최재현은 막무가내로 발버둥치는 내 발목을 한 손에 쥔다.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는다. 그리고 단단히 끈을 조여 놓은 내 컨버스 하이를 벗겨 내는 것에 열중한다. 그 동그란, 곱슬곱슬 푹신해 보이는 정수리를 무의식적으로 짚었다.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흩어진다. 포슬거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부드럽고...
본편 전개와 크게 관련 없는 내용의 과거 이야기 입니다. 나의 첫 도피는, 모든 게 마법처럼 변할 것만 같던 스무살의 첫 시작은 최재현의 입원으로 허무하게 끝이 났다. 최재현의 존재는 하잘것 없는 내 인생에 좌절감만을 더할 뿐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이전보다 나빠졌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는 더이상 최재현의 집 창고방에 거주하는 객식구가 아니었고, 고생은 조...
평일이라 사람 하나 없고 덥기만 더운 모래사장엔 쓰레기가 널려있다. 구둣발이 모래에 푹푹 빠져 걷기도 불편하고, 눈 마주치기도 무섭게 생긴 갈매기들은 깡패처럼 날아다닌다. 회색빛 바다는 반짝반짝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쪼그려 앉아 바닷물에 손 끝을 적셔 본다. 쏴아아 밀려들어왔다가 부글부글 흰 거품을 남기며 빠져나가는 파도를 가만히 보고 있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가지런히 개어진 최재현의 옷이다. 어두운 색의 맨투맨을 빤히 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잠결에 그가 나가는 소릴 들은 것 같기도 한데… 모르겠다. 팔을 뻗어 맨투맨을 당겼다. 포근한 세탁 세제 냄새에 미세하게 남은 체향이 느껴졌다. 다시 눈꺼풀이 무겁다. 내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이 삑삑삑, 도어락 소리에...
깜깜한 거실을 빠르게 지나쳤다. 빛이 새어나오는 방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익숙한 내 향기에 낯선 향이 섞여 난다. 항상 보던 따뜻한 빛의 조명도, 방안의 공기도 문득 낯설다. 늘 그렇듯 새까만 옷을 입은 남자, 서현우는 침대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진 책이 사그락, 듣기 좋은 소릴 내며 넘어갔다.
바깥의 날씨가 방 안의 공기마저 무겁고 축축하게 만들고 있었다. 최재현은 여전히 침대 안에 파묻혀 있지만, 분명 빗소리에 나보다 먼저 잠에서 깼을 것이다. 맑은 날이라면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야 할 창 밖은 여전히 어둡고 탁한 빛을 띤다.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에 최재현은 손을 들어 제 귀를 틀어 막는다. 가만히 손을 들어 그 애의 손을 어루만졌다.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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