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곳이 없었다. 병원을 나서서 하염없이 걸었다. 어느새 둘의 공간이 되어버린 최재현의 집으로 갈 수 없었다. 나는 발이 욱신거리고 다리가 저릴 때까지 걸었다. 한참을 걷고 보니 나는 원룸 건물이 모여 있는 비탈진 골목초입에 와 있었다. 한때 내 공간이 있었던 이 비탈길을 따라 올라간다고 한들 내 집은 이제 없다.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을 이곳에서 지냈지...
그 눈을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꽤 근원적인 물음이다.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찰나가 길어졌다. "글쎄." 나는 그 한 마디를 뱉고 한참 아래를 보고 있었다. 그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린 오랜 세월동안 묻어 두고 꺼내지 않았던, 그 옛날의 이야기를 꺼내야만 한다. 나는 대답 대신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최재현의 다리를 쓰다듬었다. 하얗고 탄탄한 다리에 남...
피부에 닿는 공기가 며칠사이에 많이 차가워졌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드니 하늘이 맑고 높다. 간만에 보는 청량한 하늘이다. 최근 며칠동안 담배 태우며 잠깐 하늘 볼 시간도 없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산책이라도 하지 않으면 억울할 날씨였다. 이따 갖은 핑계를 대서라도 최재현을 데리고 나가야 겠다고 생각하다가, 다시금 온전히 미운 사람이 될 수 없는...
최재현은 순식간에 문을 밀고 들어오려 하고, 나는 문 손잡이를 잡고 버틴다. 그러나 그 애가 곧 무너질듯한 얼굴을 하는 그 찰나에 나는 마음이 약해지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최재현이 힘주어 문을 밀고 들어온다. 나는 이렇게 잠깐도 최재현에게 모질어지지 못한다. 나는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문 뒤에 숨어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최재현은 무너져내린다. 언제 ...
그가 나를 안아들고 건물을 내려왔다. 그는 존재조차 몰랐던 비상용 엘리베이터로 이동하고 있었다. 주차장 입구에 널브러진 차에 나를 태운 그가 히터를 틀었다. 곧 앉은 시트가 따뜻하게 데워진다. 몇 시간을 매달려있은 줄 알았는데, 고작 이십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긴장이 풀리자 눈에서 의지와 상관없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슬퍼서가 아니라 너무 억울하고 ...
나는 회사 건물 꼭대기에 서 있었다. 나는 취했고, 취한 채로 한참 찬바람을 쐰 몸이 차갑게 식어 떨려오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지도 모르겠다. 차곡 차곡 화를 쌓아올리며 모든 가능성을 생각했다. 내가 최재현에게 맞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없었다. 수없이 고민해 봤지만 나는 최재현을 절대 이길 수 없다. 생각해 보면 항상 그랬다. 내가 살면서 한 모...
그래서 나는 그 서류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지우고 살았다. 한동안 반쯤 미쳐있었던 것 같다. 내 자신이 흡사 영혼이 없는 텅빈 껍데기처럼 느껴졌다. 좁은 내 세상에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경계를 만들고, 그 안에 나와 최재현만을 가두는 것, 그것이 우리 둘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안에서 나는 점점 더 공허해 지고 있었다. 이젠 ...
나는 서현우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에게 많이 끌렸다. 그 감정을 신기함이나 호기심 따위의 건전한 단어로 가리려고도 해 봤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스쳐간 어떤 사람에게도 가져본 적 없는, 심지어 최재현에 대해 갖는 내 특별한 감정과도 다른 종류의 것이란걸.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들이 단 한 사람을 가르키고 있어서, 오로지 내 세상에 그 애밖에...
그러나 그런 나의 감정과는, 최재현을 향한 애틋함과 안쓰러운 마음과는 별개로. 어디를 향하는지 모를 분노가 순간순간 치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나를 최재현의 세상에 가둔 것도, 영원히 최씨 일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 것도 최재우였지만, 나는 오갈 데 없는 날 거두어 준 그에게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살았었다. 그러나 대가 없는 친절은 없음을 ...
최재현이 임원 회의를 간 사이 급히 사무실을 뒤졌다. 태워 없앤 게 아니라면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정리 체계란 게 따로 없는 책꽂이와 서랍, 책상에 쌓인 결재할 서류들을 들추다가 책꽂이 하단의 금고를 떠올린다. 나는 벽 한켠을 장식한 책꽂이 앞으로 가 책을 빼 내고 드러낸 금고의 숫자가 쓰인 버튼을 빤히 본다. 그리고 생각나는 번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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