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 기간 공들이던 글을 탈고한 민재는 간만에 여유가 생겼다. 항상 집에서 혼자 일을 하기 때문에 연례 행사 수준이던 모임과 출판사 회식 등을 매일같이 몰아치더니 간만에 시간이 난 모양이다. 직업 특성상 눈 뜨고 잠드는 시간이 일정치 않은 민재를 아침시간에 멀쩡한 상태로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내가 눈 뜨기 전에 내 아침상을 차려놓고 본인은 정작...
낮동안 비어있었을 집 안 공기가 서늘했다. 신발이 어수선하게 흩어진 현관을 지나쳐 깜깜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 들린 짐들을 내려놓고 어두운 거실 불을 켰다. 하마터면 놀라 큰 소릴 낼 뻔 했다.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소파에 우두커니 앉은 인영이 그제서야 보였다. 당연하게도, 민재였다. 나는 짜증을 부리는 대신 인상을 찡그렸다.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
1. 그들이 헤어진 이유 결국 발 벗고 나서는 것은 내 몫인 걸 알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너 이거 범죄인 건 아냐?" 턱을 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최재현은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있다. "알 게 뭐야." 그 네 글자를 뱉어내는 것도 귀찮다는 듯 입을 느리게 움직인 최재현이 고개를 들어 날 본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알아 온 것이나 읊어...
"...진짜 이 상황에서 그러는거 말도 안되는 거 아는데." 다른 어떤것도 신경 쓰지 않고, 죄책감도 원망도 다 내려놓고, 그냥 그 애랑 있고 싶어.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나는 말을 더 잇지 않고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끌어올렸다. 바로 옆 방에 있는 그 애를 보고 내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대체 어떻게 행동하는게 맞는건지...
최재현은 더 해사하게 웃는다. 이곳을 둘러싼 어둠과 추위, 긴박한 상황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정신 차리라고 타박하려던 머릿속이 멍해진다. 근거없는 자신감이, 한심한 믿음이 아니었다. 저 작은 머릿속은 이미 경찰이 도착할 시간까지 계산을 마쳤다. 그러니까 웃을 여유가 있는 것이다. "울지 마. 지원아, 이제 다 괜찮아." 안 해도 될 말을 한...
윤선호가 남아서 자리를 지키기로 하고 나는 급히 최재현을 찾으러 나섰다. 회사 차들은 모두 사옥 주차장에 반납된 채로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최재현의 차는 주차장 한 켠 늘 있던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집 안의 싸늘한 공기는 최재현이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하루종일 목을 조르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내며 최재현에게 다시...
요즘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고 있는건지 알 수가 없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쁜데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점심시간 몰아치던 손님들이 수업시간에 맞춰 다 빠져나간 가게 안은 한산했다. 그제서야 나는 한숨 돌리며 멍하니 카운터 옆에 난 창문을 보고 있었다. 드르륵 휴대폰 진동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휴대폰 액정을 확인한 후 진동을 끄고 액...
어색할 정도로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가끔 일이 바쁠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많은 것이 바뀌진 않았다.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랑과 미움은 어찌 보면 결이 같다는 것을 문득 느낀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야근을 자제하자는 사내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외국과의 시차 탓에 ...
체육시간이 끝나고도 다음 수업이 시작한지 한참 지나고 나서야 교실에 돌아왔다. 최재현이라는 든든한 빽 때문에 이런 일이 잦아 출석은 보장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내 책상 서랍이 텅 비어있었다. 상황 파악이 빨랐다. 어이가 없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도 은근한 따돌림은 있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오...
나는 새까만 항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뱃멀미에 속이 너덜너덜해졌다. 마지막으로 떠날 때 이곳은 온통 붉은 단풍이 가득한 가을의 초입이었는데, 돌아온 이 곳은 눈 쌓인 겨울이다. 나는 출발할 때 입은 셔츠 하나만 걸친 상태였다. 어둡고 춥고 사람도 없다. 최재현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곳까지 와 놓고, 전화 한 통이면 만날 수 있는 그 애를 차마 볼 용기...
눈을 떴을 때는 며칠을 내리 흐리던 하늘이 맑았다. 따뜻한 햇살이 침대 위에 누운 내 피부 위에 스몄다. 나는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침대 옆이 비어 있었다. 닫힌 문 밖에서 작은 소음이 들렸다. 그가 주방을 정리하고 요리를 하는 소리였다. 다시 해가 뜨고 평화로운 일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어제 밤의 일은 나만 묻어둔다면 없던 일이 될 것이다. 비...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